크레타인 에피메니데스
에피메니데스 :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은 진실인가? 그렇다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일 것이다. 그렇지만, 에피메니데스도 크레타인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이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도 참말이다. 그가 한 말은 어떻게 동시에 진실도 되고 거짓말도 될까?
에피메니데스는 그 실재 여부가 불분명한 고대 그리스인이다. 그는 기원전 6세기경 크레타에 살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가 57년간이나 계속 잠을 잤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짓말쟁이는 항상 거짓말만 하고, 참말하는 사람은 항상 참말만 한다는 것을 법칙으로 가정할 경우, 앞에서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은 에피메니데스 자신도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뜻하므로 그가 한 이 말도 거짓말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가 거짓말을 했다면 크레타인은 항상 진실을 말하는 셈이 되므로, 크레타인인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도 진실이다.
그리스의 논리학자들은 그 자체에 모순이 없으면서도 참도 되고 거짓도 되는 이런 명제에 매우 골치를 썩였다. 스토아 학파의 크리시페는 거짓말쟁이의 파라독스에 관해 6편의 글을 썼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스의 시인 필레타스(그는 몸이 너무 가벼워 바람에 날아갈까봐 신바닥에 추를 매달고 나녔다는 일화가 있다)는 이 문제로 고심하다가 수명이 단축되었다고 한다. 신약 성경을 보면 바울도 이 파라독스를 알고 있었다(디도서 1장 12~13절).
거짓말쟁이의 파라독스
자, 이제 유명한 거짓말쟁이의 파라독스를 알아보자. 다음은 그 가장 간단한 형태이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은 참인가? 그렇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그렇다면 이 문장은 참이다. 이러한 모순토성이 명제는 일상생활에서 생각보다 훨씬 많이 쓰이고 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문장 형식은 거짓말쟁이 파라독스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 까닭은 거짓말쟁이는 항상 거짓말만 하고, 진실된 사람은 항상 진실만 말한다는 애매한 가정이 필요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변용할 수 있다. 버트랜드 러셀은 어느 날, 철학자 조지 무어(George Moore)가 일생에 단 한번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조지 무어에게 "당신은 항상 진실만을 말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한참 생각하더니 "아니오"라고 답한 것이었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배지의 예 : 배지 착용을 금지한다!
또는 낙서의 예 : 낙서 금지!
이들 명제가 왜 모순인지 아시는지? 이들은 각각이 주장하는 자체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 다른 예를 또 들어보자. "모든 스티커를 금한다"는 스티커, "여기를 보지 마시오"라는 게시물 등등. "나는 나 같은 사람하고는 결혼하진 않을 현명한 여자에게 장가들겠다"고 말하는 독신자. 회원으로 받아주는 클럽에는 가입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 또, 시금치를 좋아해서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싫증이 날까봐 시금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소녀. 그 밖에도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든지 "모든 지식은 믿을 수 없다"처럼 거짓말쟁이 파라독스와 유사한 명제들이 있다.
어떤 문장과 그 부정형
이 문장은 일곱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장에는 단어가 몇 개 들어 있는가? 여섯. 따라서, 이 문장은 그 부정형이라 참일 것 같다. 과연 그런가?
이 문장은 일곱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렇지 않다. 위의 문장의 부정형은 정확하게 일곱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도 잘못된 것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 파라독스를 지어낸 사람이 누군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래에 이와 비슷한 파라독스가 있다. \\'여기에 쓴 명제들 중 잘못된 것을 3개 고르시오.
1. 2 + 2 = 4
2. 3 * 6 = 17
3. 8 / 4 = 2
4. 13 - 6 = 5
5. 5 + 4 = 9
답 : 2번과 4번만 잘못이다. 따라서, 잘못된 것이 3개 있다는 명제 자체도 잘못이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의 잘못된 명제이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컴퓨터는 또 매우 오래 된 난제에 봉착했다. 이른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문제. 닭이 먼저일까? 천만에, 계란 없이 어떻게 닭이 생기는가? 그럼, 계란이 먼저일까? 그러나 닭이 없이 어떻게 계란이 생기는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논리학자들이 \\'무한의 역행\\'이라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파라독스이다. \\'웃는 암소\\'라는 치즈 상자의 포장지에는 크게 웃는 암소가 한 마리 그려져 있는데, 그 귀 끝에는 또 \\'웃는 암소\\' 치즈 상자가 달려 있다. 그 치즈 상자에는 또 웃는 암소가 그려져 있고, 그 암소의 귀에는 또 치즈 상자가 달려 있다......
Scientific American지 1965년 4월호의 표지에는 사람의 눈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Scientific American지 4월호 잡지가 비쳐 있으며, 그 책 안에는 다시 눈이, 눈 안에는 다시 책이 무한히 이어진다. 이발소에서 2개의 거울 사이에 앉아 있으면, 자신의 반사된 모습이 거울 속에 무한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역행을 볼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소설 [연예 대위법]의 작중 인물인 필립 콸스는 어느 작가의 이갸기를 소설로 쓰는데, 주인공인 그 작가는 또 어느 작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미국 소설가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의 [수첩]에서도 작중인물인 어느 작가가 노먼 메일러와 똑같은 색각으로 작품중에서 소설을 쓴다. 이와 같은 무한의 역행은 앙드레 지드(Andre Gide)의 [위폐범들], 포토키의 [사라고사에서 발견한 원고] 등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벼룩에 관한 시에서 수학자 드 모르간(De Morgan)이 말한 무한의 역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 했다.
큰 벼룩의 등에는 작은 벼룩이 붙어 큰 벼룩의 피를 빤다.
그리고 그 작은 벼룩의 등에는 더 작은 벼룩이
그 위에는 또 더 작은 벼룩이............. 끝없이 붙어 있다.
큰 벼룩은 또
더 큰 벼룩의 등에 붙어 피를 빨고,
더 큰 벼룩은 또 더 큰 벼룩의 등에 붙어 있고,
그것은 또.... 끝없이
더 큰 벼룩의 등에 붙어 피를 빤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파라독스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자. 크레타인에 대해서 말하는 크레타인, 스스로를 부정하는 문장, 배지를 금지하는 배지,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명제들이다. 그렇다면, 명제들이 자기 자신을 언급하는 것이 파라독스의 원리일까?
아니다. 그리스인들은 명제에서 자기 언급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파라독스를 제거하는 데 충분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플라톤 : 소크라테스의 다음의 한 말은 거짓이다.
소크라테스 : 플라톤이 한 말은 진실이다.
논리학자들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파라독스를 단순화 시켜 보았다. 이 두 문장 중 어느 하나가 얼마만한 진실성을 지니든 간에, 한 문장은 다른 것과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두 문장 중 어느 것도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진술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을 합쳤을 때 거짓말쟁이의 파라독스가 재현된다.
A : 문장 B는 거짓이다. B : 문장 A는 참이다.
중세 시대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파라독스는, 문제의 근원이 단순히 자기언급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만일 문장 A가 옳다면 문장 B는 틀려야 한다. 그러나 문장 B가 틀린다면 당연히 A도 틀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번에는 A가 틀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문장 B가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장 B가 옳다면 다시 A도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것은 출발점의 가정에 모순된다. 두 문장 중 어느 것도 스스로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두 문장을 합쳐서 생각하면, 서로가 다른 쪽의 진실성을 뒤집어버리기 때문에 도대체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판정할 수 없게 만든다.
자, 아래의 초청장의 파라독스로 여러분의 친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보자. 이것은 영국의 수학자 저덴(P.Jourdain)이 만든 것이다.
초청장의 한쪽 면에는 \\'반대편에 적힌 말은 진실입니다\\' 라고 쓰고, 다른 쪽에는 \\'반대편에 적힌 말은 거짓입니다\\'라고 쓴다.
앨리스와 하트 왕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파라독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앨리스와 하트 왕의 경우처럼 2개의 무한의 역행을 포함하고 있다.
앨리스 : 나는 잠자는 하트 왕의 꿈을 꾸는데, 하트왕은 꿈 속에서 나를 꿈꾸고, 나는 그를 꿈꾸고, 그는 또 나를 꿈꾼다. 이것은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앨리스가 하트 왕을 만나는 이야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 4장에 나온다. 거기서 하트 왕은 잠들어 있고, 트위들디가 앨리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은 앨리스의 꿈을 꾸고 있는데, 왕에게는 앨리스가 꿈 속의 대상일 뿐 그 밖에 아무런 현실성도 갖지 않는다."
"만약 이 순간 왕이 깨어난다면," 트위들디는 덧붙여 말했다. "너는 마치 촛불을 불어 끈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앨리스의 꿈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억해야 한다. 하트 왕이 앨리스의 꿈 속의 인물인가? 아니면 앨리스가 하트 왕의 꿈속의 인물인가?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꿈인가? 계란과 닭의 역행은 닭과 계란이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지만, 여기서의 역행은 순환적이다. 그것은 마치 손 A는 손 B를, 그리고 손 B는 손 A를 그리는 M.예셔의 그림과 같다.
이 이중의 꿈 이야기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에 대하여 깊은 철학적 사고를 하게 만든다. 버트랜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유머로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민거리일 것이다."
악어와 아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아기를 빼앗은 악어가 그 어머니에게 문제를 내는 이야기를 즐겨 했다.
악어 : 내가 아기를 잡아먹을지 안 잡아 먹을지 알아 맞히면 아기를 무사히 돌려주지.
어머니 : 오오! 너는 내 아기를 먹고 말거야.
악어 : 어떻가지? 내가 아기를 돌려주면, 네가 못 알아 맞힌 것이니까 내가 아기를 잡아먹어야 하고, 내가 아기를 잡아먹으면 네가 바로 맞힌 셈이니까 아기를 돌려주어야 할텐데..
불쌍한 악어는 하도 골치가 아파서 아기를 돌려 주고 말았다.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며 아기를 데리고 달아났다.
악어 : 빌어먹을! 저 여자가 내가 아기를 돌려줄것이라고만 했어도 맛있는 식사를 할 수있었을텐데.....
이 파라독스를 좀 더 자세히 검토하면서 어머니의 지혜를 음미해보자. 어머니는 악어에게 "너는 내 아기를 잡아먹고 말거야"라고 말했다.
악어는 어떻게 하든지간에 스스로의 약속을 어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기를 돌려주자니 어머니가 거짓말을 한 것이 되어 아기를 잡아먹어야하고, 잡아먹자니 어머니가 바로 맞힌 것이 되어 돌려주어야 한다. 악어는 자기모순을 지닌 논리적 파라독스에 빠진 것이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너는 내 아기를 돌려줄 거야"라고 말했을 경우를 한번 상상해보자.
그러면, 악어는 아기를 돌려주던지 잡아먹든지 아무 모순도 겪지 않는다. 만약 아기를 돌려준다면 어머니가 알아맞힌 셈이므로 악어는 약속을 지킨 것이 된다. 거꾸로 악어가 아기를 먹어버린다면 어머니가 틀린 것이고, 따라서 악어는 아기를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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